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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책과 영화, 문화생활에 대하여

[도서리뷰]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2007), 기아에 대한 이야기

by 리리뷰어 2023. 7. 28.

 

부의 불평등에 관한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진짜 '굶주림'에 관한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오래된 스테디 셀러를 하나 골라 읽어 보았습니다. 저는 책의 주제가 막연히 가난, 부의 분배와 관련한 것이리라 짐작했습니다. 왜 세계의 부는 골고루 나누어 지지 못하고 특정 자본들이 독식하고 있는가? 왜 공산주의는 쫄딱 망해 버렸고 자본주의, 자유주의가 세계를 접수하게 되었는가? 말하자면 일종의 경제학 또는 자유주의의 부작용, 수정자본주의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예상은 살짝 빗나갔고, 책의 주제는 그보다 조금 더 직접적인 것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기아'. 이 책은 세계의 굶주림에 관한 것입니다.

 


​1. 도서 및 저자 정보

 책의 저자는 학자이자 활동가로 유엔 인권위원회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한 경력을 가진 장 지글러입니다. 스위스의 사회 학자로 소르반 대학교와 제네바 대학의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살아계십니다). 제가 읽었던 책의 발매일은 2016년인 것으로 되어있었으나, 본래 이 책은 2007년에 출간된 책입니다. 2016년도 벌써 6년 전 일이지만, 2007년은 무려 15년 전이니 신간 도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즉, 이 책은 [유엔의 식량특별조사관]이 직접 집필한 [15년 전 '세계 기아'에] 대한 책입니다. 국제 기구인 유엔은 식량특별조사기구까지 갖추고 '기아 박멸' 활동을 벌이고 있지 않나요? 대충 생각해 보아도 지금 상황은 전보다 훨씬 더 나아졌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책의 주제를 잘못 파악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는 왠지 심드렁한 기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2. 기아와 구조적 문제

 그러나 여러번 재출간된 이 책에서 전하고 있는 사실은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세계의 기아는 책이 출간되었던 2007년보다 오히려 더 심해졌으며, 오늘날 세계에서는 2007년의 세계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인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 오히려 불러오는 배와 영양분이 부족해 멀어가는 눈을 가지고, 끝없는 고통 속에서 사람들이(그리고 죄 없는 어린이들이) 죽고, 죽고, 또 죽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유엔(UN, United Nations)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정의로운 기관인줄 알았습니다. 전 세계가 합심하여 만든 기구로, 무적의 권력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UN은 뭐랄까, 일종의 도덕과 같은 것 같습니다. 법과 도덕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범법자는 집행기관의 처벌을 받게 되지만, (법으로 규정되지 않은) 도덕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비난을 받는 것이 끝입니다. 유엔이 도덕이기 때문에, 법의 역할을 맡는 국제법과 국제사법재판소의 위상은 약간 모호합니다. 유엔의 산하 기관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강제력이 약합니다. 최소한의 도덕이어야 할 '국제법'은 잘 지켜지고 있을까요?

과한 비유이긴 하나 행정력이 약해 갱단에서 경찰 목을 따버리는 사건이 일어나는 나라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국제사법재판소의 집행력은 상당히 느슨하며 유엔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안전보장이사회의 판단에 따라 판결이 유야무야 되기 일쑤입니다. '옳은 일'을 하려고 하나 '옳은 일'의 정의는 각 나라의 이해관계에 따라 쉽사리 정의되기 어려우며,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기관인만큼 개별 국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유엔은 결코 만능이 아니며 일종의 명예직과 '옳은 일'을 하려 애쓰는 단체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아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엔은 인간의 삶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이자 필요인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FAO(Fool and Agriculture Organizaion of UN)를 두고 책의 저자인 장 지글러처럼 식량특별조사관 등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나 거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배고픈 이들이 쓰러져 있어 눈 앞에 먹을 것을 가져다 주기만 하면 되는 문제라면 오히려 쉬울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굶어 죽는 와중에도 그 곳에는 이익을 향유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강대국, 거대 자본과의 관계는 상황의 해결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책에서 가장 인상깊게 보았던 부분인 부르키나파소의 비극적 실패가 대표적입니다. 부르키나파소가 젊은 개혁가의 혁신으로 빈곤에서의 탈출과 자립의 희망을 꿈꿀 때, 인접국가의 부패한 권력층은 자신들의 피지배층이 (그들 입장에서) 반갑지 않은 자극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구 지배계층은 내부의 배신자를 충동질하여 혁명을 좌절시켰으며, 스스로 일어서려던 작은 국가는 순식간에 다시 고꾸러지고 말았습니다.

(해제를 써주신 분과 너무 같은 사례라 죄송하지만) 와인과 포도로 유명한 칠레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에게 분유를 공급하겠다는 칠레 인민전선의 공약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지나친 포퓰리즘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도 아동수당과 보육수당을 제공하고 있으며 많은 국가들이 양육을 위한 복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영양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국가가 나서서 분유를 나누어주겠다는 공약이 그리 이상해보이지는 않습니다. 장기적으로 특정 품목을 선택하여 제공한 것이 부작용을 초래할 수는 있겠지만 칠레의 상황은 그만큼 긴급했고, 어쨌든 국가는 정당하게 돈을 주고 분유를 구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다국적 기업 '네슬레'에게 상황은 '가여운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준다'와 같이 단순한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네슬레가 침투하고 있는 현지 칠레 농장들에 대한 지배력 약화에 대한 우려, 그리고 부르키나파소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웃 국가 부패한 권력들의 걱정으로 인해ㅡ 모든 것은 다시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변화의 주력들은 죽고 패배했으며, 희망에서 절망으로 빠져드는 더 큰 고통만이 남게 된 것입니다.

 책에 따르면 기아는 단순히 '먹을 것을 전달'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먹을 것을 전달, 살포하기만 하는 행위는 해당 지역 지배계층 또는 힘의 논리로 무장한 군 정부를 지원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 또한 '정의를 실천'히고 있다든가 '신념을 위해서' 라는 등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논리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과 이해의 교차는 동시에 너무나 많은 아이러니를 낳게되고 맙니다.

 

 

​3.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책의 저자는 이처럼 복잡하고 끔찍한 세계 기아 문제를 위해 어떤 해답을 제시하고 있을까요? 그는 죽어가는 세계의 절반에 대한 인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작은 행동들이야말로 이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소 뻔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여기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보겠습니다.

 '남의 다리 부러진 것보다 내 손가락 밑 가시가 더 아픈 것'이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착취하는 권력층 중에서는 혁명의 쿠데타로 인한 사망 위험 등 심각한 리스크를 가진 이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금융자본가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그들은 제 손가락 밑 가시를 살피는 데 여념이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 '가시'란 당장의 주가, 배당과 같은 것일 것입이다. 초국적기업 임원이라면 다음 성과급 또는 다음 회기까지의 계약 연장이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굶주리는 세계는 시야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뿐입니다.

어떤 노인이 그 달에 받게 될 배당금이 줄어들게 된다면 당장의 생필품을 사는 데 어려움을 겪게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노인이 영양 부족으로 부푼 배, 실명한 눈, 끔찍한 고통과 함께 죽게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선진국에서 그와 비슷한 계층, 그 또래의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규정하는 데에는 다소간 못미치는 생활을 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척 중요하고도 분명한 것은 그의 것을 빼앗는다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급여를 선뜻 기부하는 사람, 봉사를 즐겨하고 이웃과 고통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들로만 가득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들의 문제는 너무나 복잡해서 인간의 이타성, 공감 능력, 선함에 대한 호소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왜 망했습니까? 공산주의는 사람을 너무 믿어서 망한 것입니다.

세계의 굶주림 문제란 누군가에게는 다소의 귀찮음이거나 손가락 밑 가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시 정도가 아니라 사지가 날아가는 고통,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문제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변화는 반드시 핏빛 깃발을 나부껴야 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완급을 조절할 수 있을까요?

굶주림 문제 해결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세계의 석학들이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좋은 일'이 아니라 '이득이 되는 일'이라고 설득 논리를 만들어 선량하지는 않아도 이윤 계산에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이들을 같이 끌어모을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ESG 이슈는 이 분야에 큰 울림을 주는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 이익이 늘어납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좋은 일을 해서 보람을 느껴야 한다는 도덕 메시지보다 이와 같은 패러다임의 변화가 더 많은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부가 넘치는 세계는 더 많은 자본을 탐하는 이기적인 동기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이타성, 공감 능력, 선함에 대한 호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선함은 오늘날 유엔 FAO를 있게 했고, 거기서 구원 받은 많은 많은 생명들이 이타성의 중요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거리와 관성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 앞 이웃의 고통을 지구 반대편의 죽음보다 중요한 일로 느낍니다. 기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심리적인 거리를 더 가까이 가져와야 합니다.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같은 사람임을, 내 이웃과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도록 더 많은 문제 제기가 필요합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 책이 출간된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세계의 절반은 지금도 굶주리고 있습니다. 보다 영리한 문제 제기만이 굶주리고 있는 세계와 우리의 세계간 심리적 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굶주림의 문제를 이웃의 것으로 인식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관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빈곤 포르노'라는 말이 있습니다. 빈곤한 삶에 대한 자극적 노출로 모금, 후원을 이끌어내는 현상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과거보다 덜 감성적이고 냉소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빈곤 포르노라는 개념이 정립되고 널리 사용되면서, 그에 대한 반발심도 커졌습니다. 전에는 굶주리는 아이들의 영상 한 번에 모금 ARS 버튼을 누르던 사람들이 이제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채널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오랜 기간 도움에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기아의 관성, 어차피 모든 것은 빈곤 포르노일 뿐이라는 냉소적인 생각이 지난날 우리의 지원자들을 돌아서게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나아지지 않은 비참한 삶이겠지만, 이미 예전과 같은 방식의 도움 호소는 사람들에게 빈곤 포르노로 인식되기가 쉽상입니다.

지난 몇 년간 굶주린 사람들에게도 세계 어디나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얼마나 더 악화되었을까요? 작고도 거대한 변화의 물결 없이는 앞으로 6년, 15년, 또는 수십년 뒤에도 우리는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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